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문단 편집) ==== 제3의 위치 ==== 첨언을 하자면, 파시즘과 관련해서 일컬어지는 [[제3의 위치]], 혹은 제 3의 길이라는 말은, 자유주의(자본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민족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이며, 제3의 위치 내에서도, [[좌익 파시즘]]이 있고, 극우 성향의 파시즘이 있다. [[슈트라서주의]]를 비롯한 [[나치즘]]의 좌파부류는 전간기에 [[제3의 위치]] 중에서도 [[좌익 파시즘]]에 가깝다.그도 그럴 것이, 기존 좌익의 입장에서 볼 때 [[계급]]보다는 민족 공동체를 우선으로 하고 반민주주의적 입장을 견지했으므로 좌파의 입장에 반드시 대입되지는 않지만[* 대입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반대다. 당시 마르크스주의 이념은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는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계급투쟁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복지를 강조하며 반자본주의적 입장이 강했고, 우파의 입장에서 볼 때 전통적인 봉건적 왕당파와는 궤를 달리하는 인민주의적 관점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희생과 신비주의에 대한 숭고미를 추구했다. [[제3세력]]과 같은 포지션은 대립하는 두 이념, 정치세력 사이에서 언제나 나오게 되어 있다. 나치즘은 제3의 위치에 영향받은 파시즘의 방계 정도로 자리잡고 있다고 평가되곤 한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제3의 위치라는 것이 다른 사상에 비해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도 않고, 의미있는 정치 세력이 드물기 때문에 좀 헐렁하게 대충 어림잡아 제3의 위치이라고 뭉뚱그레 호칭되는 면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영국에선 1950년대 국가노동자당 같은 정당이 되레 노동당과 척을 지고 보수당과 통합되는 정치 성향만으로 볼 때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실 나치당내 좌파들은 실제로 좌파적 정책들을 독일 [[게르만족]] 사이에서 실현시키려 했는데, 히틀러가 정치적 안정과 재무장을 위해서 [[부르주아]]들과 타협하고 정권을 잡자 배불러진 나치당 간부들은 좌파 성향에서 멀어지게 된다. 사회혁명을 부르짖던 돌격대가 좌파의 중심은 아니고 1933년 정권 잡기 직전 숙청 된 [[그레고어 슈트라서]](동생 [[오토 슈트라서]])가 이탈하면서 당내 좌파 세력이 약화된 탓도 있다. 이들의 정치적 성향은 히틀러 몰래 자유주의 우파정당과 연립정권을 시도할 정도로 오히려 나치 주류보다 유연했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경험한 독일에서는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자유/자본주의 이념 및 체제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으며, 이는 1920년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포괄적인 의미의 반(反)서구주의적 ‘[[보수혁명]](Konservative Revolution)’으로 나타났다. 그들 중 일부는 10월혁명에서도 사회주의적 성격보다 반서구적 측면에 주목했으며, 볼셰비즘을 자신들의 명칭으로 삼을 만큼 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의미상 대립적인 단어들의 결합인 [[민족볼셰비즘]]은 일견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19/20세기 유럽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주의와 치열하게 싸운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계급 대 민족, 국제주의 대 민족주의의 대립으로 표현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갈등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에서 특히 첨예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변적인 현실정치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갈등도 확고하고 항구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민족볼셰비즘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민족볼셰비즘의 핵심 인물인 니키쉬(Ernst Niekisch)는 자신이 주도한 운동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저항운동은 순전한 서구의 이념들을... 거부한다. 로마의 지배사상, 로마법, 1789년의 사상, 문명의 이념들,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부르주아적 세계관과 경제관 등 이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은 독일의 자유 투쟁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전제이다. ... 저항운동은무엇보다 정치적으로 단호하게 동구로 시선을 돌릴 것을 요구한다. ... 모든 수단을 동원한 군사력의 강화, 로마법적인 사유재산의 거부. 사유재산권의 제한, 자본주의적 경제 및 사회 체제의 폐기. 세계경제 체제로부터 포괄적이고 무조건적인 탈퇴.” 이처럼 민족볼셰비즘의 핵심은 자유/자본주의로 상징되는 서구의 거부와 친(親)동구에 있었다. >따라서 민족볼셰비키는 서구와 다를 뿐 아니라 대립적인 러시아를 우호적으로 바라보았다 >... >독일에서 패전과 베르사유 조약이 끼친 영향은 공산주의자들마저 민족주의적으로 만들만큼 컸다. 1차 세계대전을 시장의 분할을 둘러싼 자본들 간의 싸움으로 보고 전쟁을 거부하며 자본주의 체제의 타도를 외쳤던 독일 공산당조차 조약이 야기한 프랑스에 대한 증오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종전 직후 독일에서 반(反)프랑스 정서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민족을 배제한 채 계급만으로 노동자의 지지를 얻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이란 마르크스의 이론에서는 허구였지만 당시의 현실에서는 매우 구체적인 것이었다. >민족볼셰비즘을 처음 언급한 인물들은 1918년 독일 공산당 창당 멤버들이기도 했던 라우펜베르크(Heinrich Laufenberg)와 볼프하임(Fritz Wolfheim)이었다. 두 사람은 계획경제와 함께 독일이 러시아에 접근할 것을 촉구했다. 정복당한 독일은 두 ‘프롤레탈리아 민족국가’의 동맹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베르사유 늑약’이 독일 제국을 조각내자, 독일 민족 거의 전부가 프롤레타리아화했고 혁명의 주체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민족을 대표하는 집단은 노동자계급이라고 보았다. 이들 두 사람은 민족해방의 주체를 노동자계급으로 보았다는 면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였으나 베르사유 조약과 관련해서는 민족주의적인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 >윤용선, 러시아 10월 혁명과 독일 [[보수혁명]], 1920년대 [[민족볼셰비즘]](Nationalbolschewismus)을 중심으로, 2018, vol., no.39, pp. 5-33 (29 pages)[[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41297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